
제물포 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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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활동의 숨은 거점 중봉대로 - 장세현
인천 동구 송현동의 동국제강에서 시작해 현대제철을 지나, 서구 청라국제도시와 경서삼거리로 이어지는 큰 도로를 중봉대로라고 부른다. 중봉대로, 그 이름만으로는 무슨 뜻인지 언뜻 이해가 안 된다. 중봉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유명한 ‘조헌’의 호다. 최후를 맞이한 700 의총이 있는 충남 금산도 아니고 고향인 경기도 김포도 아닌 인천에 어찌하여 중봉 조헌을 기리는 도로 이름을 붙였을까.
중봉과 인천의 관계는 율도라는 섬을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다. 조헌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 율도를 농사지을 땅으로 개간하고, 왜군이 몰려오자 그 섬으로 가족들을 들여보내 살도록 한 뒤 자신은 의병을 일으켰다.
일제강점기까지 낚시터로 유명했다는 율도는 매립되어 흔적조차 없어져버렸다. 조헌이 율도를 개간한 내용은 《토정비결》로 유명한 이지함의 이야기로 알려졌다. 조헌이 상을 당하자 문상을 온 이지함이 “10여 년 뒤에 천하에 반드시 큰 난리가 있어 백성이 참살당해도 이를 감당할 사람이 없을 조짐" 이라 말했다. 조헌은 토정의 얘기를 듣고 율도를 개간했다.
조헌은 1571년 홍주에 있을 때 이지함의 학식이 대단히 높음을 알고 멀지 않은 곳에 있던 그를 찾아가 사제의 연을 맺고 가르침을 청했다. 이때 이지함은 조헌에게 이이, 성혼 등을 스승으로 삼을 것을 추천했다. 조헌은 율곡 이이를 스승으로 섬기고 '율곡을 떠받드는 후학' 이라는 의미로 후율이라는 호도 갖게 되었다. 조헌은 사람을 사귈 때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는, 당시로는 파격적인 사고를 가졌는데 이 또한 토정과 율곡에게 배웠음이 틀림없다.
강직한 사림 정신의 소유자 조헌은 개혁론자이기도 했다. 그는 나라가 위급할 때 물러서지 않고 직접 나설 줄 알았다. 그래서일까. 조선 후기 실학자 박제가는 《북학의》 〈자서>에서 '나는 어릴 적부터 고운 최치원과 중봉 조헌의 사람됨을 사모하여 비록 사는 시대는 다르나 말을 끄는 마부가 되어 그분들을 모시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지니고 있었다.’ 고 했다. 박제가 자신이 얼마나 조헌을 흠모하는지를 밝혀 놓은 대목이다. 실학파의 거장 박제가가 가장 존경했다는 조헌이 개간한 율도를 지금은 가볼 수 없는 게 한없이 안타까울 뿐이다.
율도는 밤톨처럼 생겼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인천의 향토사학자 이훈익 선생이 1993년에 펴낸 《인천지명고》는 '율도는 작약도 동북부에 위치하고 서양 사람들은 '구리르' 라 하였는데 이는 프랑스 기함 '규리르호'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이름이다. 이 율도는 일제 때부터 가장 좋은 낚시터로 널리 알려져 있다. 원래 이 섬은 중봉 조헌이 농토로 개척하여 임진왜란 때 그의 가족이 은신 피난한 곳이기도 하다' 고 설명한다. 또한 이 섬에 인천화력발전소와 경인에너지 공장이 대규모로 건설되었다고 소개한다. 율도 발전소는 1960년대 후반 공사에 들어가 1970년대 초반 가동을 시작했다. 썰물 때 물이 빠지면 걸어서도 오갈 수 있었다는 섬 율도는 이때부터 섬이 주는 낭만적 이미지를 완전히 잃었다고 할 수 있다.
율도의 주섬인 밤섬은 향나무가 유명했다고 하는데, 그 운명도 참으로 기구하다. 정유공장과 발전소가 들어서기 이전 율도에는 화약고가 먼저 건설되었다. 1900년이다. 한반도에 매장된 각종 광석을 서로 캐내어 가기 위한 서구 열강들의 치열한 경쟁이 있을 때다. 광산 회사들은 채굴용 폭약을 대량으로 들여왔는데 그 하역 장소가 인천이었다. 1889년 연수구 옹암에 독일계 세창양행 화약 인천 최초로 들어섰다. 곧이어 미국계 타운센드상회가 율도에 조선 최대 규모의 폭약창고를 설치했다.
조헌과 율도를 이야기할 때 빠트리지 말아야 할 것은 임진왜란 때 인천의 역할이다. 아홉 의병장의 작품집인 《임진년 난리를 당하매》를 보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치자>라는 조헌의 글이 실려 있다. 그 속에 '아, 조선이여! 천우신조로 하여 아직도 서해안 일대가 살아 있다. 나라를 보위하려는 애국적인 백성이 있거니 어찌 목숨을 바쳐 싸우려는 영웅들이 없을쏘냐' 란 구절이 나온다. '아직도 서해안 일대가 살아 있다' 는 얘기는 왜군이 점령하지 못한 강화도와 문학산 서쪽을 중심으로 한 서해안 라인을 말한 게 아닐까. 실제로 임진왜란 때 강화도는 김천일을 중심으로 한 의병활동의 숨은 거점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