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포 FM

소정방의 흔적이 드리워진 소래포구 - 정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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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는 포구가 여럿 있다. 강화군이나 옹진군 같은 섬지역은 물론이고 남동구나 중구, 동구 등 도심 지역에도 포구가 있다. 남동구 소래포구는 수도권에서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지이자 어시장이다. 송도경제자유구역과 경기도 시흥의 배곧신도시, 마천루 같은 아파트가 빼곡한 그 틈을 비집고 배가 드나드는 포구다. 20년 전까지만 해도 그저 너른 갯벌과 바다였을 뿐이다.


소래포구는 인천과 경기도 시흥을 경계 짓는 아주 깊은 갯골이다. 드나드는 물살이 얼마나 거센지 예전에는 동력선이 아닌 어선들은 물때에 맞추어야만 포구를 드나들 수 있었다. 갯골 수로의 낭만적 풍경과 함께 어선과 어시장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소래포구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요인이다.


소래, 그 이름이 참 묘하다. 한자로 보면, 소는 되살아난다는 뜻이고 래는 나물로 유명한 명아주를 일컫는다. 이 둘을 합쳐 놓으니 무슨 말인지 언뜻 이해하기 어렵다. 소래가 들어간 이름은 또 있다. 소래포구와 멀지 않은 곳에 소래산이 있다. 인천대공원과 맞닿아 있으며, 인천과 경기도 시흥의 경계 지점에 있다. 소래포구와 소래산의 이름은 소정방이 왔던 곳 이라는 의미에서 원래는 '소래蘇來’ 였는데 언제부터인가 '소래蘇萊’로 변했다고 한다. 

《인천지명고》에서 소래산을 설명한 대목을 보자.


‘소래산의 한자 표기는 소래(蘇來)였는데 근래에 들어 소래(蘇萊)가 되었다. 신라시대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이곳에 왔다고 해서 이름 지어졌다.’


이훈익은 소래포구의 지명 유래도 소래산과 같다고 했다. 소래포구와 소래산은 소정방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인천 앞바다 덕적도에 바짝 붙어 있는 소야도가 그 실마리를 제공한다. 소야도의 이름 역시 소정방과 관련이 있다. 660년 당나라군이 백제를 치기 위해 한반도에 왔을 때 덕적도 일대에 상륙해 소야도에 머물렀던 듯하다.

《삼국사기》는 당나라 소정방 군대가 중국을 출발, 인천 덕적도에 도착해 신라군과 합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정방이 당군 1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략한 첫 코스가 중국 산둥반도에서 인천 덕적도에 이르는 항로였다는 설명이다. 《삼국유사》가 전하는 나당 연합군의 백제 공격 초기 모습도 위와 비슷하다.


신라의 파병 요청을 받은 당나라가 백제를 침략하기 위해 한반도에 첫발을 내디딘 곳이 바로 인천 앞바다였다. 그 덕적군도에 포함된 섬 소야도는 '소정방 섬'이라는 뜻의 이름을 아직도 버리지 않고 있다. 우리 민초들은 그 옛날부터 역사적 사실을 지명 짓기 등의 방식으로 남김으로써 오래도록 잊지 않고 기억했다.


소야도와 소래포구, 소래산, 인천 앞바다에서 포구를 거쳐 내륙으로 이르는 루트처럼 가지런한 느낌이다. 여기서 생각할 게 하나 있다. 나당 연합군과 백제군 사이에 펼쳐진 정보전 가능성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하듯 신라군과 당나라군은 덕적도에서 백제 공격 작전을 짰다. 신라군도 병선을 동원했다. 당나라군과 함께 서해안선을 따라 내려가 기벌포(금강 하구)를 거쳐 백제로 직접 침투할 수도 있고, 당나라군이 인천 해안에 상륙해 신라군과 함께 육로로 진입하는 방안도 있었다. 하지만 당나라군은 금강으로 배를 타고 갔으며 신라군은 육로를 택했다. 백제군은 양쪽으로 방어 병력을 나누어야 했기 때문에 더욱 힘들었다. 나당 연합군의 육·해 병진 작전은 자연스럽게 백제군의 전력 분산을 유도해 백제군을 무너뜨린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이 작전을 결정하기 위해 소정방이 직접 소래포구를 거쳐 소래산까지 올랐을 가능성도 있다. 아니면 소정방은 덕적도에서 이미 금강을 향해 바다로 떠났는데, 마치 소정방이 소래포구를 거쳐 소래산으로 이동한 것처럼 허위 정보를 흘렸을 수도 있다. 아무튼 당시 나당 연합군의 작전은 기막히게 맞아 떨어졌다.


어물전과 포구를 구경하기 위해 들른 소래포구는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당나라 장수 소정방 군대가 이 땅에 몰려들었던 백제 멸망 시기인 서기 660년으로 우리를 안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