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포 FM

누구의 손에도 잡히지 않는 꽃. 작약도 - 이호경

cartoon campus

영종도 동북방, 월미도 서북방 바다 위에 작은 섬 하나가 떠있다. 작약꽃 같이 생겼다 하여 작약도다. 원래 이름은 물치도 또는 무치도였다 고 한다. 이를 일제강점기에 작약도라 고쳐 불렀다. 행정구역으로는 동구 만석동에 속해 있으며, 공유수면과 육지면적을 합쳐 총 12만 2538제곱미터 규모다. 작약도를 오가는 배편은 2012년 1월에 끊겼다.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지만 예전에는 인천의 이름난 관광지였다. 이야깃거리도 많았다. 인천 앞바다를 거쳐 한강으로 가기 위해서는 작약도를 지나야 했다. 병인양요나 신미양요를 일으킨 프랑스나 미국의 군함들도 이 작약도에 정박해 공격 태세를 점검했다.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 함대의 이름을 따서 '보아제 섬'이라 했고, 신미양요 때는 나무가 울창하다 하여 '우디 아일랜드' 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인천지명고》에서는 작약도를 인천의 주요 관광지 12곳 중 다섯 번째로 소개하고 있다.


‘작약도는 영종도 동북방에 잡힐 듯한 거리에 있다. 원래의 이름은 물치도이다. 영종진에 땔나무를 공급하던 수목지로 부천군에 예속된 섬이었으나 1963년 1월 1일에 인천시에 편입되었다. 일제 때에는 스스기라는 일본인의 소유였으나 해방 후 화수동에 살던 이종문이란 사람이 여기에 고아원을 설치 운영하다, 6·25와 더불어 폐쇄되었는데 그후 성창희라는 사람이 불하받았다고 해서 한때 문제가 된 적도 있었다. 천혜의 지형과 수목으로 덮여 있는 작약도가 지금은 정태수의 개인 소유이며, 그 경관과 피서지로서 경향각지에서 관광객이 수없이 찾아들고 있다. 작약도란 이름은 섬 형태가 마치 작약꽃 봉우리 모양 생겼다고 지은 이름이라 한다.’


이 책이 나온 때가 1993년이다. 당시의 주인이라던 정태수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한보그룹 회장을 말한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를 촉발시킨 정태수 회장은 해외 도피생활을 해 왔는데, 2019년 그의 넷째 아들이 체포되어 국내에 압송되고 나서야 2018년 12월에 사망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작약도를 소유한 사람은 여럿이 있었으나 누구 하나 잘 된 경우가 지금까지 없었다. 조선시대까지는 섬을 개인이 소유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니, 당연히 왕실 소유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첫 개인 소유자는 《인천지명고》에 등장하는 것처럼 일제시기의 '스스기'라는 일본인이다. 이 이름은 인천시립박물관의 이경성 초대 관장의 회고록인 《어느 미술관장의 회상》에서도 거론된다.


‘작약도에 살던 스즈키라는 사람이 도자기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정보를 얻은 나는 홈펠 중위와 최원영과 더불어 찾아갔더니 이미 물건은 없어지고 그 집은 고아원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내친걸음에 정보를 수집하여 보니, 그 유물들을 영종도에 옮겼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종도로 건너간 우리는 어느 민가 담 밑에 숨겨 놓은 한 트럭분의 도자기를 접수하였다. 그러나 작약도의 주인이었던 스즈키라는 일본인은 미술품을 보는 눈이 없어서인지 1000점에 달하는 것들이 모두 가짜였던 것이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4월 1일 개관한 인천시립박물관에 전시할 유물을 찾아다녔던 사연의 일부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도자기 유출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경성 관장도 일부 도자기들이 가짜임을 모르고 몇 점을 골라 고려청자라고 인천시립박물관에 진열했던 모양이다. 해방 후 최초의 공립박물관이던 인천시립박물관에 가짜를 진열해 놓았다는 얘기가 어느 잡지에 실렸다. 이 관장은 톡톡히 창피를 당했다고 자서전에 썼다.


1976년 한보그룹에 넘어갔던 작약도를 한보사태 직전인 1996년 인천의 해운업체인 원광이 인수해 해상 관광단지로 개발하려 했다. 하지만 원광마저 부도가 났고, 2005년에는 진성토건이 매입해 대대적인 작약도 개발 계획을 발표했으나, 진성토건 역시 부도가 나고 말았다. 이후 진성토건 채권단 손에 넘어갔다가 2020년 2월, 부동산 경매 중개 전문기업이 법원 경매를 통해 94억 원에 낙찰 받았다. 작약도는 운명적으로 개인이 소유할 수 없는 섬으로 보였는데, 이번에는 어떻게 될지 관심이 크다. 2019년 인천시는 작약도를 매입해 관광지로 개발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는데, 낙찰 기업으로부터 적정 가격에 사들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공공 개발을 통해 작약도의 기구한 운명이 제 자리를 잡고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변신하기를 바란다.


작약도와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또 하나 있다. 여러 재력가들이 떼돈을 벌기 위한 관광지로 개발하려고 애쓰는 와중에도 작약도는 문학소녀들의 시심을 돋우는 소중한 공간으로 기능했다. 이를 증명하듯 문둥이 시인으로 유명한 한하운이 인천여고 학생들과 함께 작약도에 소풍을 갔다가 쓴 시가 전해진다. <작약도>, 인천여고 문예반과'라는 부제를 달았다.



‘작약꽃 한송이 없는 작약도에

소녀들이 작약꽃처럼 피어.

갈매기 소리 없는 서해에

소녀들은 바다의 갈매기.

소녀들의 바다는

진종일 해조음만 가득 찬 소라의 귀.

소녀들은 흰 에이프런

귀여운 신부

밥 짓기가 서투른 채

바다의 부엌은 온통 노랫소리.’



이 시는 《한국문학》 1977년 6월호에 실렸다. 한하운 시인이 이때 인천여고 문예반 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쳤던 듯하다. 시인도 작약도라는 이름이 왜 그렇게 지어졌는지 궁금했나보다. '작약꽃 한 송이 없는 작약도'를 시의 첫머리에 올려놓은 것으로 보아 섬 이름을 그렇게 붙인 게 영 못마땅하다는 눈치다. 학생들은 작약도에 가서 밥도 지어먹을 정도로 오래 머물렀다. 서투른 밥 짓기가 시인의 눈에 잡히고 말았다.


최근 행정구역 관할 관청인 인천 동구가 작약도의 이름이 일제강점기에 엉뚱하게 지어진 점을 바로잡기 위해 예전에 불리던 물치도로 바꾸기 위한 작업에 나섰다. 이 안은 인천광역시 지명위원회를 통과했으며, 2020년 하반기 국가지명위원회를 통과하면 작약도라는 이름은 물치도로 환원된다. 하루 빨리 작약도가 공공의 영역으로 돌아와 지금 학생들도 작약도에 소풍가서 40년 전 문학소녀들과 문둥이 시인 한하운이 그랬던 것처럼 섬 나들이를 노래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