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물포 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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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 속 중국 범종이 맞이하는 인천시립박물관 - 박주하
인천시립박물관 앞뜰에는 아주 특별한 종 3구가 나란히 서 있다. 우리가 사찰에서 흔히 보는 부드러운 스타일이 아니라 어딘지 딱딱한 느낌을 주는 이 종은 중국에서 건너온 것들이다. 시립박물관은 도시가 지나온 이력에 비해 규모가 작은 편이지만, 이 종들이 건네는 이야기는 특별하다.
연수구 옥련동 인천상륙작전기념관 위에 자리 잡은 인천시립박물관은 해방 이후 지방 정부가 처음 만든 박물관이다. 애초의 위치는 이곳이 아니었다. 1946년 4월 1일 중구 만국공원의 인천향토관을 개조해 개관했다. 초대 관장은 우리나라 미술평론 분야를 개척한 이경성 선생이다. 이 관장의 자서전 《어느 미술관장의 회상》에 박물관 개관 당시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펼쳐진다.
이경성 관장은 1945년 10월 31일 박물관장으로 발령을 받았고, 5개월여의 준비과정을 거쳐, 국내 첫 시립미술관을 개관했다. 개관식은 오전 10시 박물관 회랑에서 열렸다. 내빈으로 참석한 인사는 임홍재 인천시장, 길영희 인천중학교 교장, 황광수 인천시교육감, 미군정장관 스틸만 중령, 미군정 교육담당관 홈펠 중위, 그리고 인천의 유지들이었다. 길영희 교장이 교육감 앞에 놓였다는 점으로 당시 인천에서 길 교장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미군정에서 참석한 인사들도, 시립박물관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미학을 전공하며 박물관에 관심을 갖게 된 이경성 관장은 개성부립 박물관장으로 있던 우현 고유섭 선생과 편지로 교유하면서 박물관 관련 분야에 대해 배웠고, 해방 때까지 그 관심을 놓지 않고 있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미군정청 교화국장 최승만을 찾아갔고, 처음 만난 최 국장은 그 자리에서 국립중앙박물관 김재원 관장에게 전화를 걸어, “모처럼 기특한 젊은이가 생겼다." 며 소개했다. 그때는 국립중앙박물관도 정식 개관을 하기 전이라 달리 할 일도 없이 열흘 쯤 서울의 사무실로 출근만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인천 미군정청에 근무하는 홈펠 중위가 찾아왔다. 그는 인천 향토관 건물을 임대해 박물관을 만들어보자는 제의를 했다.
‘1945년 10월이 다 되어 가는 어느 날, 인천으로 돌아온 나는 임홍재 시장을 만나고 향토관을 두루 살핀 후, 그것을 시립박물관으로 만들 결심을 하였다. 그로부터 며칠 후인 1945년 10월 31일. 인천시장실에서 미군정관과 시 간부들이 있는 가운데 인천시립박물관장 발령을 받았다. 대우는 촉탁이고 월급은 300원이었다. 우선, 개관 날짜를 만국공원 주변에 꽃이 만발하는 4월 1일로 정하고, 준비에 착수하였다.’
국내 첫 시립박물관, 그 첫 박물관장은 이렇게 태어났다. 미군의 아이디어로 시작해 1개월여 만에 예산도 한 푼 없이 관장부터 발령을 냈다. 이경성 관장은 건물 수리부터 했다. 홈펠 중위와 직접 지프를 타고 다니면서 인천기계제작소 등, 여러 공장들에서 재료를 조달했다. 향토관은 독일인들이 조선 말기에 지은 세창양행 사택이었다. 건물 외관을 장식하는 12개의 아치가 아름다웠다고 한다.
건물 보수 이후에는 소장품 수집이 문제였다. 일본인들이 향토관으로 쓸 때 갖고 있던 선사유적이나, 개화기 유물 또는 사진들이 일부 있었고, 국립중앙박물관 김재원 관장을 졸라서 문화재급 작품 19점도 빌려왔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도 60점의 민속품을 빌렸다. 이들이 유물을 빌려준 이유는, 인천시립박물관을 국립민속박물관 분관으로 삼으려는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관 설치에 따르는 예산을 확보하지 못해, 이 안은 성사되지 못했다. 인천 세관창고에는 물러가는 일본인들의 물건이 몰수되어 쌓여 있었는데, 이경성 관장은 그 창고를 1개월 정도 출입하면서 필요한 물건들을 가져왔다. 이 또한 미군정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게다. 어떤 수집가로부터 골동품을 기증받기도 했다. 이 관장은, 소장품 수집의 여섯 번째 일로, 중국 종을 찾게 된 이야기를 소개했다.
‘하루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들렀더니 김재원 관장이 인천부평 조병창에 일본 사람들이 무기를 만들기 위하여 중국 각지에서 빼앗아 온 철물들이 있다는데 보았느냐는 것이다. 사실은 금시초문이었지만, 아는 척하고 돌아와서 그 다음 날로 홈펠 중위와 함께 조병창에 가서 알아본즉, 많은 종과 불상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을 몇 가지 골라 달라고 하여, 미군 트럭에 싣고, 송학동 박물관으로 가져온 것이다.’
이때 가져온 3구의 중국 종이, 지금 인천시립박물관 앞에 그럴듯하게 자세를 잡고 서 있는 것들이다. 원나라 때 범종과,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지만 송나라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범종, 그리고 명나라 때 범종이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작은 명나라 범종이 맘에 든다. 덩치 큰 원나라와 송나라 것에는 공통적으로 '황제만세 중신천추'라는 글귀가 새겨 있다. 황제와 주요 대신들의 만수무강을 비는 내용이다. 그러나 명나라 종에는, '풍조우순 국태민안' 이라고 썼다. 비바람이 적당하기를 빌고 국민들의 삶이 평안하기를 기원하는 내용이다.
앞에 인용한 예문 중에 '많은 종과 불상들이 있었는데 몇 가지 눈에 띄는 것만 골라서 가져왔다.'고 했다. 그 많던 조병창의 불상과 종들은 어디로 갔을까. 우선 확인할 수 있는 곳은 강화 전등사다. 여기에도 시립박물관에 있는 것들과 겉모양이 비슷한 중려온 중국 종들은 국 종이 하나 있다. 제작 연대는 북송 시대인, 1097년이라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전등사도 일제강점기에 원래 있던 종을 빼앗겼는데, 해방이 되자마자 주지스님이 부평조병창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하지만 전등사 종은 이미 녹여버렸는지 찾을 수가 없어 옛 종과 가장 비슷한 것으로 골라 싣고 왔다고 한다.
일제는 1930년대 후반 한반도를 넘어 중국 대륙까지 점령하기 위해 전쟁을 확대했다. 그 군수기지로 인천조병창을 세웠고, 한반도와 중국 지역의 민가는 물론 산속까지 뒤져 쇠붙이라는 쇠붙이는 모조리 공출해 왔다. 녹여서 무기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때 끌1945년 8월 일본의 패배로 목숨을 건져 옛 이야기를 속울음으로 들려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