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물포 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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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짠물의 진수, 소금밭 - 방호빈
인천 짠물의 진수 소금밭
흔히 인천사람을 '인천 짠물'이라고 부른다. 인심이 야박하고 인색하다는 부정도, 맹물보다 야무지고 근성 있다는 긍정도 함께 품고 있는 별칭이다. 하지만 인천이 소금의 본고장이었기 때문에, 짠물일 수밖에 없기도 하다.
인천은 예로부터 곳곳이 소금밭이었다. 주안염전에서 천일염을 만들기 시작한 이후, 남동 염전, 군자 염전, 소래 염전 등이 잇따라 들어섰다. 주안 염전은 1909년, 88 정보 이후 계속 증축해, 총면적이 212 정보에 달했다. 남동염전은 1921년, 300정보 규모로 만들어졌고, 군자염전은 1925년 575 정보로 시작해 603 정보로 늘렸다. 이들 주안, 남동, 군자 염전은 관영이었다.
염전들은 갈수록 규모가 커져, 《인천부사》에 따르면 이 세 곳에서 생산한 천일염이 당시 한반도 전체 수요의 21퍼센트를 차지했다고 한다. 소래염전은 1934~1945년 사이에, 549 정보 규모로 만들어졌다가, 600여 정보까지 증축했다. 용현동과 숭의동 일대에도 염전이 계속 만들어져, 인천의 해안 대다수가 천일염전 지대가 되었다.
일제가 대한제국 정부를 앞세워 천일염전을 조성한 것은, 호렴으로 불리던 값싼 중국 소금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소금은 일본으로 수탈해 가는 중요 물자였으며, 이는 군수품 조달에 꼭 필요한 염화나트륨 등을 얻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염화나트륨은 폭약 등 각종 무기의 제조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기초 품목이다. 일제가 중국과 전쟁을 벌이던 1941년 화약, 뇌관 제조 공장인 조선유지 화약공업을 소래염전과 가깝고, 남동염전과 맞닿아 있는 인천 고잔동에 설립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인천의 조선유지 화약공업 공장은 한국화약의 모태가 되었다. 소래포구와 가까운 곳에 있던 한국화약 공장 터 자리가 지금은 대단위 아파트 단지로 변모했다. 최신식 주거지역에서, 우리나라 화약산업의 역사와 소금밭 이야기를 연결하게 되다니, 참으로 별일이다 싶다.
천일염 이전에도 인천은 소금으로 유명했다. 바닷물을 끓여 얻는 자염방식이었다.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인천도후부' 편에는, 인천의 주요 특산물 중 하나로 소금을 꼽고 있다. 또 고려시대 문인 이곡의 시를 인용해, 자연도, 즉 영종도를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에 소금 굽는 대목이 나온다. 영종도 쪽으로 뱃놀이를 갔던 모양이다.
‘가다가 자연도를 지나며, 삿대를 치고, 한 번 한가하게 읊조린다. 갯벌은 구불구불 전자 같고, 돛대는 종종 꽂아 비녀와 같도다. 소금 굽는 연기는 가까운 물가에 비꼈고, 바다 달은 먼 멧부리에 오른다. 내가 배타고 노는 흥이 있어, 다른 해에 다시 찾기를 약속한다.’
바닷물의 소금기를 가득 머금은 함수를 솥에 넣어 끓이기 위해서는, 땔감이 엄청나게 많이 필요했다. 따라서 소금 생산을 위해서는 해안가, 특히 나무가 무성한 지역마다 염부를 두었다. 인천에도 이런 곳이 많았을 게 틀림없다. 육지의 해안가는 물론이고, 섬 지역의 해안가도 마찬가지였을 게다. 아주 오래 전부터 많은 이들이 소금 만드는 일에 매달린 이유는 단 한 가지다. 소금이 인간에게 꼭 필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소금은 그 이름부터 아주 귀하게 인식되었다. 소금 염 자는, 신하가 소금을 그릇에 담아 두고, 지키는 모양에서 비롯했다. 서양 역시 마찬가지다. 월급쟁이를 뜻하는 샐러리맨의 샐러리가, 소금에서 왔다. 고대 로마의 병사들이 급여를 소금으로 받았던 데에서 연유한 듯하다.
소금은 우리 생명을 유지시키는 데 꼭 필요한 요소 중 하나다. 전쟁 중에도 소금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전략물자였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는, 소금과 관련한 기록이 여러 곳에 보인다. 전선에서 중요한 일을 처리한 장졸들에게, 하사품으로 '술 쌀 10말과 소금 1곡'을 보내기도 했다. 1곡은 10말이다. 쌀과 소금의 양을 똑같이 했다는 것은, 그 값어치가 같다는 얘기다. 실제로 임진왜란 당시 소금값은 쌀값과 맞먹었다. 조선시대 선비 오희문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기 피란살이를 하면서 쓴 일기 《쇄미록》에, 소금값을 알려주는 대목이 있다.
1596년 12월 9일 자에, '소금 13두를 팔았더니 쌀 12두 6되이다' 라는 내용이 그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이렇게 귀한 소금을 자체 조달하기 위해, 위수 지역의 섬에 염장을 설치했다. 염장을 관리하는 감독관과, 소금을 굽는 사람들을 별도로 배치했고, 소금이 나면 각 예하부대에 적절히 분배했다. 거북선만으로 일본군을 상대한 게 아니었다.
임진왜란 발발 360년 뒤, 그러니까 1950년대 초·중반, 인천에는 섬마다 염전이 만들어지다시피 했다. 시도염전이 그 전형을 보여준다. 시도에서 오래 산 노인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섬 주민 모두가 나서서, 갯벌에 둑을 쌓아 염전을 일구었다. 1951년 1·4후퇴에서 복귀한 이후, 몇 년 동안 계속되었다. 남자는 돌덩어리와 흙을 등에 지고 날랐고, 여자와 아이들은 머리에 얹거나, 가슴팍에 안고 날랐다. 동네사람 모두가 나선 것은 밀가루나 보리쌀 같은 먹을 것을 일당으로 받기 위해서였다. 샐러리맨의 어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당시 일한 주민들이 받았던 밀가루와 통밀을 '480 양곡' 이라고 불렀다. 'PL 480', 미국이 1954년 법제화한 '잉여 농산물 원조법'에 따라, 자국 내 남아도는 농산물을 처리하기 위한 지원 양곡이었다. 시도염전이 토지대장에 등재된 것은 1959년이다. 지목은 염전, 면적은 15만 1753제곱미터였다. 《옹진군지》에 따르면, 이렇게 조성된 옹진군 내 염전이 1987년 4월 기준으로, 총 53개였다.
인천의 대다수 염전지대는 공단지대 혹은 아파트 단지로 바뀌었다. 주안 염전은 1968년 주안 공업단지로, 남동염전은 1980년대 남동공단으로 바뀌었고, 소래염전은 1990년대 중반, 기능을 상실했다. 그러나 거리 곳곳에는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주염로, 염창로, 염전로, 염골 근린공원 사거리 등의 지명은, 그곳이 한때 염전이었다는 사실을 혼잣말처럼 전해준다. 사람들은 무심코 그 길을 지나친다.
현재 인천에 남은 상업용 염전은 중구 을왕동의 동양염전과, 옹진군 시도의 시도염전, 둘 뿐이다. 이곳도 일하는 염부들이 턱없이 부족해 언제 문을 닫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백령도의 백령염전은 노동력 부족으로, 2017년 가을부터 생산이 중단되었고, 인천광역시 대공원 사업소가 운영하는 남동구 소래습지생태공원 염전은 관광체험용 시설이다. 인천지역 천일염 생산량은, 2016년 1020톤, 2017년 820톤, 2018년 775톤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아무래도 인천에는 소금박물관이 필요해 보인다. '짠물' 인천의 속살 같은 도시 변천사를 깊숙하게 그려낼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