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물포 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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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이 끊이지 않던 귀한 약재. 강화인삼 - 안현서
도둑이 끊이지 않던 귀한 약재 강화인삼
한국 인삼은 세계적인 장수식품, 건강식품으로 꼽힌다. 인삼의 학명인 '파낙스 진생 '의 파낙스는 만병을 다스리는 약이라는 뜻이다. 인삼의 효능이 만병통치약 수준으로 좋다는 얘기다.
강화도에는 인삼 센터가 몇 곳 있다. 외지인들이 찾기 쉽도록 강화대교나 초지대교 입구, 버스터미널 근처에서 특산물인 강화인삼을 판다. 판매센터는 각각의 인삼조합이 별도로 관리한다. 규모가 큰 인삼조합에는 400명 가까운 조합원이 가입되어 있다. 강화도 사는 함민복 시인도, 강화대교 입구에서 인삼 장사를 한다.
강화도 인삼이 유명해진 것은 개성인삼 덕분이다. 강화도에서 언제부터 인삼이 재배되기 시작했는지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전문가들은 1900년대 초반 개성에서 인삼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왕래하면서, 강화도의 인삼 재배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6·25전쟁때, 강화로 피란 온 개성 사람들이 인삼 농사에 합류하면서, 인삼밭이 급격히 늘었다.
1970년대, 전국의 인삼 경작 면적을 비교해 보면, 강화도는 홍삼에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백삼은 금산에 이어 2위였다. 1980년 발행된 《지리학》 제22호에 실린 논문 자료를 근거로 한 내용이다. 해방 후, 국내 첫 문화원 잡지로 1948년 창간된 《강화》에 실린 당시 강화군청 공무원의 기고문을 보면, 해방 후 전쟁 전까지는 강화의 인삼 재배 면적이 많지 않았다. 보리가 가장 많았고, 채소, 감자, 과일 등이 뒤를 이어, 인삼은 밭벼에도 미치지 못했다.
개성 인삼의 시작점도 명쾌하게 밝혀져 있지는 않다. 연구자들은 경상도 산간이나 전라도에서 시작되어, 개성으로 전파되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개성의 향토사학자 송경록이 지은 《개성 이야기》에서조차, '오랜 옛날부터 인삼을 재배했다'고만 언급한다. 개성 인삼의 시초를 실감나게 그린 장면은 소설에서 볼 수 있다. 황석영의 《장길산》이다. 전라도 화순에 살던 모녀가 산삼 재배기술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어찌어찌하여 개성으로 흘러들었지만 죽을 지경으로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그들에게 개성상인 박대근이 다가갔다. 장길산의 후원자 역할을 하게 되는 인물이다. 개성의 자본과 전라도 산삼 재배기술이 만나, 개성 인삼이 되었다는 게 우리나라 최대 이야기꾼으로 꼽히는 황석영의 풀이이다.
개성의 인삼 재배방식은 어떠했을까. 강화에 사는 개성 출신 인삼 재배 노인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참으로 힘겨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삼밭에 거름을 주고, 삼을 심고, 종삼을 키우는 일이 만만치 않다. 4~5년근에서 씨앗을 채취해 종삼을 만들고, 그걸 깨끗한 모래에 섞어 아침저녁으로 100일 동안 물을 주어야 한다. 종삼을 옮겨심기 전에 삼포에 거름 주는 일도 보통 정성이 아니다. 좋은 거름은 구벽토, 구재, 가답 세 가지를 섞어야 한다. 오래된 집터나 벽에 붙은 흙이 구벽토고, 솥이나 굴뚝, 방고래 같은 곳에 쌓인 검댕이 구재다. 낙엽이나 콩 썩은 것이 가답이다. 요즘은 이름도 낯선 이런 것들을 구해, 거름을 만들어 삼밭에 내야 했다. 지금 강화에는 개성 전통방식에 따라 인삼농사를 짓는 사람이 거의 없다. 80대 후반 노인들만이 겨우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해방 직후 강화 인삼조합은 정부에 전매국 지정구역으로 편입해 달라고 줄기차게 요구했다. 전매국 산하로 들어가면 수매제도가 있어서인지, 인삼 판매에서 여러 가지로 편리한 측면이 많았던 모양이다. 1946년 10월, 정부는 강화 인삼조합을 개성 관내로 편입시켰다. 개성 인삼과 강화 인삼이 아예 한 몸이 되어버린 거였다.
전매국에서 수매한 인삼도, 주민들이 일일히 껍질을 벗기고 다듬어야 했다. 그것도 고된 노동이었다. 그 인삼 껍질 깎는 장면은 개성 출신 소설가 박완서의 산문집 《두부》에 실린 '개성사람 이야기' 속에 생생히 드러나 있다.
‘송도시내에 사는 여자들이라고, 다들 장롱 걸레질, 솥뚜껑 행주질만 하고 산 것은 아니다. 그들도 기회만 있으면 체면 가리지 않고, 경제활동에 나섰다. 수매한 인삼 백삼으로 만들려면, 껍질을 벗겨야 한다. 그때가 가정부인들이 빈부나 지체를 가리지 않고, 부엌에 나서는 때이다. 조합 너른 마당에 큰 맷방석에다 인삼을 산처럼 쌓아놓고, 여자들이 둘러앉아, 대나무칼로 인삼 껍질을 벗긴다. 한 맷방석에 아홉 명, 열 명, 혹은 열한 명씩 둘러앉는다. 열심히 손도 놀리고 입도 놀리며 껍질을 벗기기 시작하면, 대개 오전 중에 끝난다. 작업이 끝나는 대로 임금이 지불된다.’
인삼 껍질 벗길 때 가장 힘든 것은 얽힌 뿌리를 다듬는 일이다. 뿌리가 ‘사람 인’ 자 모양으로 곧게 뻗어 있으면 좋지만, 서로 얽혀 있는 '악바리'는 작업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고집 세고 모진 사람을 일컫는 악바리란 말이 인삼 껍질 벗기는 작업에서 나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전매국을 통하지 않는 밀매도 성행했다. 인삼 밀거래는 오래된 얘기여서, 조선 말기에는 인삼 밀매범을 효수에 처할 정도로 엄하게 다루었다. 1930년대에도 밀매범 단속이 심했다. 1933년 1월 23일자 <동아일보>에는, '홍삼 밀매범 인천에서 검거'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강화에 사는 사람이 홍삼 35개를 갖고,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타려다가 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받는다는 내용이다. 당시에는 강화에서 서울로 가기 위해서는 강화 나루에서 중구나 동구쪽 부두를 오가는 여객선을 이용해야 했다. 그리고는 인천역에서 서울행 기차를 탔다. 값비싼 물건이라, 인삼 도둑도 많았다. 강화도에서 4년근이 지나면, 삼포마다 관리자를 내세워 야간 순찰을 돌았지만, 도둑을 막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