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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와 헌책방의 상관관계. 소성주와 배다리 - 임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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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와 헌책방의 상관관계 소성주와 배다리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가 그 지역 음식과 술을 맛보는 것이다. 인천은 막걸리 소성주가 유명하다. 인생을 소풍에 비유했던 시인 천상병은 읊었다. 막걸리는 술이 아니고 밥이라고. 밥일 뿐만 아니라, 즐거움을 더해주는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이보다 더한 막걸리 예찬이 있겠는가.


우리나라 막걸리 역사는 어디까지 올라갈까. 문헌상으로는 고려시대에도 막걸리와 유사한 술이 있었다. 1123년 고려에 외교사절로 왔던 송나라 문신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 나온다. 질그릇 술독 항목에서, 고려의 술 이야기를 한다.


‘고려에서는 찹쌀이 없어서 멥쌀에 누룩을 섞어 술을 만드는데, 빛깔이 짙고 맛이 진해 쉽게 취하고 빨리 깬다. 왕이 마시는 것을 양온이라고 하는데 좌고에 보관하는 맑은 법주 이다. 여기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질그릇 술독에 담아서 누런 비단으로 봉해 둔다. 대체로 고려인들은 술을 좋아하지만, 좋은 술을 구하기가 어렵다. 서민의 집에서 마시는 것은 맛이 텁텁하고 빛깔이 진한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마시고 모두들 맛있게 여긴다.’


서긍이 말하는 '서민의 집에서 마시는 텁텁하고 진한 빛깔'의 술, 우리가 요즘 마시는 막걸리를 설명한 느낌이다. 서긍은 고려에 들어올 때 하루, 귀국하는 길에는 6일이나 인천 영종도에서 묵었다. 영종도는 그 시절에는 자연도라 했는데, 제비들이 많아 그렇게 이름 붙었다고 한다. 붉은 노을에 비친 제비가 마치 자줏빛으로 보였기 때문이리라. 영종도에 머물며 먹은 음식에 대해서는 '음식은 10여 종인데 국수가 먼저이고 해산물은 꽤 진기하다. 그릇은 금, 은을 많이 쓰는데, 청색 도기도 섞여 있다. 쟁반, 소반은 모두 나무로 만들어 옻칠을 했다'고 적었다. 고려의 접대가 푸짐했던 모양이다. 국수를 맨 먼저 냈다는 것이 특이하다.


서긍이 고려에서 보았다는, 술을 담아서 보관하는 질그릇 독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으나, 커다란 항아리 임에는 분명하다. 딱 그 질그릇 독을 떠올리게 하는 커다란 항아리를 몇 년 전, 인천 옹진군 시도의 양조장 취재를 갔다가 본 적이 있다. 북도 양조장이었는데, 거기서는 도촌주라고 하는 시도 막걸리를 제조해 팔고 있었다. 이름 자체가 '섬마을 술'이니 정답기 그지없다. 양조장 대문 밖 담벼락 아래에는 아주 오래된 용기를 거꾸로 엎어놓았다. 밑이 깨져서 쓸 수 없는 것을 광고판처럼 양조장 상징물로 쓴 것이다. 가만히 쳐다보다가 깜짝 놀랐다. 아니, 일제시기에 만든 막걸리 제조용 용기가 아닌가. '쇼와' 표기가 선명했다.


쇼와 연간은 1926년부터 1989년까지이다. 해방 이후에 제작했다면 쇼와 연호를 새기지 않았을 터다. 그렇다면 1926년부터 1945년 해방 이전에 만들었다는 얘기가 된다. 막걸리를 숙성시키는 발효실에도 똑같은 항아리들이 여러 개 있었다. 표면에는 '경기 개량 옹천형' 이라고 쓰여 있었다. 서울과 경기 지역의 전통적인 용기 양식을 개량해 만들었음을 알려준다. 그 아래로는 술의 용량과 담근 시기 등을 적을 수 있는 칸을 세로로 표기해 두었다. 사람도 많이 살지 않는 섬에서 일제시기에 제작된 막걸리 항아리를 마주한 기분은 참으로 묘했다.


일제는 이 항아리에 적힌 쇼와 연간이 시작되던 1926년에, 술을 만드는 데 필수적인 누룩 제조업자 합동 정리를 단행했다. 인천에서는 그 이듬해에 ‘인천누룩제조조합'이라는 회사가 만들어지고, 공장이 들어섰다. 판매구역은 인천부, 부천군, 강화군, 김포군이었다. 지금의 인천광역시 행정구역이 거의 포함되어 있다. 시도에 양조장이 들어선 것은, 화려했던 조기 파시와 관련이 깊다. 조기 떼를 따라 수많은 어선과 어부들이 섬으로 몰렸으니, 거기에 술이 빠질 수 있겠는가. 조기를 잡으러 사람이 왔고, 그 사람들을 좇아 외딴 섬에까지 양조장이 들어온 것이였다.


인천을 대표하는 막걸리, 소성주는 인천의 옛 이름에서 따왔다. 신라 때 인천을 부르던 이름이 소성이었다. 《삼국사기》 '소성현’ 항목을 보면, '본시 고구려 매소홀현 인데, 경덕왕이 개명했으며, 지금의 인주, 경원매소 라고도 하고 ‘미추’ 라고도 한다 ' 라고 했다.


이 소성이라는 이름을 막걸리에 붙여서일까, 아니면 맛이 으뜸이어서일까, 소성주는 인천을 대표하는 술로 우뚝 섰다. 소성주라는 이름은 1990년에 생겨났다. 우리나라 업계 최초로 출시한 100퍼센트 쌀막걸리의 첫 상표에 '소성주' 라고 한자로 썼다. 그 전에는 그냥 '인천 막걸리'였다.


소성주를 만드는 회사는 '인천탁주'다. 1974년 대화주조, 동영주조, 부림주조, 부천양조, 영화양조, 인천양조, 주안양조, 창영양조, 계림주조, 태안양조 등이 합쳐 하나의 회사를 만들었다. 공장은 부평구 청천동에 있고 대화주조 출신 정규성 대표가 이끌고 있다. 그는 한국 막걸리협회 회장도 맡고 있다.


참여자들 중 가장 오래되었으면서, 옛 양조장의 공장 모습을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는 것은 인천양조다. 인천 동구 배다리에 있다. 헌책방거리 삼거리에서 창영초등학교 쪽으로 가는 골목 초입의 2층짜리 건물이 옛 양조장이다. 그 앞에는 로봇 모양의 양철 조형물이 서 있어서 외지인들도 찾기 어렵지 않다. '인천양조 주식회사'라고 한자로 쓴 문패도 아직 걸려 있다.


양조장과 왼쪽으로 맞붙은 한옥은 주인이었던 임영균 선생 가족이 살던 집이다. 임영균 선생의 장인 최병두 선생이 1920년대에 설립했던 것을, 집과 양조장 그대로 사위가 떠맡았다. 임영균 선생은 일제시기 치과의사이면서 언론인으로, 또 문화인으로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인천의 대표적 인물이다. 《경기사전》에 나온 이력에는 맡은 직책이 7가지나 된다. 인천양조 주식회사 사장을 인천 언론 역사의 큰 뿌리를 이루고 있는 '주간 인천 사장'에 이어 두 번째로 적은 걸 보면, 당시 양조장 사장의 지위를 짐작할 수 있다.


임영균 선생이 살던 집과 인천 양조장을 처음 방문한 것은 2007년 7월이었다. 그때는 며느리와 손자가 살고 있었다. 양조장 건물은 '스페이스 빔'이라는 문화단체가 입주하기 위해, 인테리어 공사를 하는 중이었다.


인천 양조장이 있는 배다리는 인천의 대표적인 헌책방 거리이다. 잘 나가던 시절에는 서울 청계천, 부산 보수동과 함께, 전국 3대 헌책방거리로 꼽혔다. 헌책방은 6·25전쟁 직후인 1953년 창영 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노점 형태로 시작되었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배다리에 가게 형태로 자리를 잡았고, 헌책방 수도 늘어났다. 한창 때는 40여 곳이 성업해 부산 헌책방 장수들이 와서 책을 사가기도 했다. 봄 신학기가 되면, 학생들이 줄을 서서 책을 사 '봄에 벌어 1년을 먹고 산다'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지금은 아벨서점을 비롯해 5곳 정도만 남았지만, 옛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어서 지난 시절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나 영화 촬영지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배다리의 헌책방거리와 양조장, 같은 동네에 있다는 것 말고는 전혀 연결고리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임명균 선생이 등장하는 순간 얘기가 달라진다. 선생의 선친이 인천에서는 최초로 책방을 했기 때문이다. 책을 파는 서점이라기보다는 빌려주는 세책이었다. 그 책도 인쇄하고 장정한 게 아니라 창호지 같은 데다 목판으로 찍거나 붓으로 쓴 뒤 묶은 것이였다. 삼국지, 유층열전, 옥루몽, 수호지, 춘향전, 심청전 따위의 소설책이 많았다. 하루 빌리는 데 동전 한 푼이면 되었다. 저녁에 밤잠을 먹어가면서, 등잔불 아래 가족이나 이웃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