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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감리서 감옥을 탈출하다. 김구 이야기 1 - 이시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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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감리서 감옥을 탈출하다. 김구 이야기 1


인천에는 중봉대로 이외에도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을 기리는 도로 명칭이 더 있다. 백범 김구의 호를 딴 백범로도 그중 하나다. 인천 한복판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주요 도로다. 인천은 백범 인생에서 대단히 중요한 공간이다. 그는 인천에서 옥살이를 두 차례 했는데, 첫 번째 옥살이 이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그래서일까. 김구는 《백범일지》에 “인천은 의미심장한 역사지대라 할 수 있다”고 스스로 의미를 부여했다.


백범은 1896년 3월,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 보복 차원으로, 일본군 중위 스치다를 죽였다. 두 달 뒤, 고향인 황해도 해주에서 체포되어 해주 감옥에 갇혔다가, 외국인 사건을 다루는 인천감리서로 이송되었다. 법무부에 해당하는 법부는 백범을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고종에게 건의했다. 고종이 판결을 보류했지만 사형수나 마찬가지 신세였다. 인천 사람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뜻을 모아 구명운동을 벌였다. 강화의 김주경이 앞장섰다. 김주경은 재산을 팔아가며 구명운동에 뛰어들었지만 실패하고 만다. 물상객주 박영문과 안호연도 나섰다. 이들은 옥바라지 하는 백범의 어머니를 돕기도 했다. 김주경은 구명운동이 먹혀들지 않자, 탈옥을 권유하는 시를 지어 옥에 갇힌 백범에게 주었다.


백범의 탈옥 뒤에는 김주경을 비롯한 인천 사람들이 있었다. 백범은 말했다. “김주경이 그같이 자기 전 재산을 탕진해 가며 내 한 목숨 살리려 했던 것도 그렇고, 인천항에 사는 사람들 중 한 사람도 내가 옥중에서 죽는 것을 원하는 사람이 없음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2년여를 인천 감옥에 있으면서, 백범은 자신을 위한 구명 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사회적 책임감을 크게 느꼈다. 옥중에서 《대학》 등 전통 학문을 더 익히면서 《세계역사·지지》, 《태서신사》 등 신 서적도 읽었다. 그 과정에서 그동안 품어온 척양의 판단이 편협했음을 깨달았다.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글을 모르는 이들을 위해 소장을 대신 써주는 대서일도 했다. 인천에서의 첫 번째 감옥 생활은, 백범이 하층민과 함께하는 교육가이자, 독립운동가로 성장하는 데 전환점이 되었다.


김구는 극적으로 무기수로 감형받고, 1898년 3월, 인천감리서 감옥을 탈옥했다. 스물셋 김구는 탈옥을 결심하자마자 이를 성공시키기 위해 철저히 준비했다. 탈옥 과정을 되짚어 보면, 몇 가지 흥미로운 대목이 눈에 띈다.


1단계로 삼릉창을 준비했다. 김구는 탈옥을 앞둔 어느 날, 면회 온 부친에게 "대장장

이에게 한 자 길이 삼릉창 하나를 만들어 달라 해서 새 옷 속에 싸 들여 달라”고 부탁했다. 그 삼릉창은 김구가 감옥 바닥에 깔린 벽돌을 들추고, 땅속을 파내는 도구가 되었다. 창끝의 모서리가 셋인 삼릉창은 조선 후기 국방 무기 중 하나로, 벽돌을 들출 때 날이 부러지는 사고를 막기에 제격이었다. 삼릉창 얘기는 120년이 넘도록 주목한 사람이 없었다. 삼릉창을 튼튼하게 만들어낸 인천의 대장장이는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김구 탈옥의 결정적 조력자가 된 셈이다.


2단계로, 같이 옥살이하던 사람 중 함께 탈옥할 이들을 골라 팀을 구성하고, 그중 재력이 있는 이에게 근대 화폐인 백동전 200냥을 가져오게 했다. 이 돈으로, 탈옥 당일 저녁, 80여 명의 죄수들에게 술판을 벌여 주었다. 당직 간수가 아편쟁이라는 사실을 알고, 간수에게는 미리 아편을 먹였다. 간수는 아편에 정신줄을 놓고 죄수들은 술에 취해 노래하니, 감옥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었다.


3단계인 탈출 경로도 흥미롭다. 삼릉창으로 바닥을 뚫어 감옥 밖으로 나가 담을 넘기 위한 줄사다리를 매어 놓았다. 혼자서 먼저 밖에 나와 잠시 갈등했다. 위험을 줄이기 위해 혼자 갈 것인지, 약속한 이들과 같이 갈 것인지. 결론은 죽을 때까지 부끄럽게 살지 말자는 것. 나온 구멍으로 다시 돌아가 네 사람을 내보낸 뒤 자신은 맨 나중에 나왔다. 담을 넘을 때도 맨 뒤에 섰다. 그런데 앞사람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는 바람에, 감리서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감시병들이 옥문을 열고 들어오는 와중에, 줄사다리를 오를 겨를도 없어 4미터가 넘는 담벼락을 한 길쯤 되는 몽둥이로 장대높이뛰기 하듯 넘었다. 다른 탈옥자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혼자 남은 그는, 삼릉창을 들고 정문인 삼문으로 갔다. 막아서는 자가 있다면 삼릉창으로 싸울 각오였으나, 비상상황에 불려가느라 지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걸어서 감리서를 나왔다.


《백범일지》에는 그의 동선을 추정할 수 있는 지명이 등장한다. 해변 모래밭, 감리서 뒤쪽 용동 마루터기, 천주교당의 뾰족집, 화개동 마루터기, 인천항 5리 밖, 인천서 시흥 가는 대로변, 벼리고개, 부평, 양화진 등이다. 밤새도록 해변 모래밭을 헤맸다고 했으니, 지금의 중구와 동구 쪽 바닷가를 왔다갔다 한 듯하다. 날이 샐 때가 되어서야

도심으로 길을 잡아, 서울 쪽으로 향했다. 이미 순검들이 쫙 깔렸다. 집 밖에 낸 아궁이에 숨기도 하고, 인천과 시흥 어름에서는 대로변에 심어진 어린 소나무의 포기 속으로 들어가, 해가 질 때까지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꼼짝 않고 죽은 듯이 버티기도 했다. 시골 방앗간에서 짚을 깔고 또 하룻밤을 보낸 뒤, 문전걸식하며 부평을 거쳐 서울 양화진에 당도했다. 그리고 이내 백범은 충청도, 전라도 등 삼남으로 길을 떠났다.


탈옥 뒤 백범은 김창수라는 이름을 바꾸게 된다. 구명을 위해 애쓰던 강화에 사는 유

완무가 새 이름을 지어주었다. 지금 우리가 부르는 그 김구이다. 백범 김구의 탄생은 그 정신과 이름 모든 면에서 인천과 뗄 수가 없다. 그리하여, 인천의 백범로는 대한민국의 근현대 역사를 질주하는 도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