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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대공원 백범광장의 동상. 김구 이야기 2 - 장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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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대공원 백범광장의 동상. 김구 이야기 2


인천에서 경기도 시흥, 부천으로 넘어가는 경계지점에 인천대공원이 널따랗게 펼쳐져 있다. 인천시민은 물론이고, 부천과 시흥 주민들도 많이 이용한다. 야트막한 산 속에 시설물이 많지 않으면서 숲길이 좋다. 그 공원 한쪽 구석에 백범광장이 있다. 김구 선생과 그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동상을 세워 놓은 곳이다. 인천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백범로의 동쪽 끝자락이기도 하다.


서울 남산 백범광장에 우뚝 선 백범 동상은 많이 알고 있지만, 인천에도 백범 동상이, 그것도 어머니 동상과 함께 있다는 사실은 아는 이가 많지 않다. 이곳은 곽낙원 여사의 동상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아주 특별한 공간이다. 백범이 인천에서 2년 가까이 1차 옥살이를 할 때, 그의 부모는 백방으로 구명운동에 나서고, 헌신적인 옥바라지를 했다. 여러 인천 사람들이 백범을 위해 나서준 것은, 그 부모의 애틋한 자식사랑에 감명 받은 부분도 있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한 2019년의 4월, 인천대공원 백범광장을 찾았다. 벚꽃이 흩날리며, 비처럼 내리는 산책로는 사람들로 붐볐지만, 약간 외진 백범광장은 찾는 이가 거의 없었다. 백범의 동상은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보게 되지만, 그 옆에 초라하게 서 있는 어머니 동상은 설명을 읽기 전에는 누구를 기리기 위한 것인지 알아차리기가 어렵다.


곽낙원 여사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머리를 땋아 위로 묶은 것이며, 허름한 치마저고리이며, 가녀린 얼굴 생김새와 작은 키, 왜소한 몸매까지, 옥바라지 할 때 그 모습 그대로 백범의 눈으로 재현했다. 오른손에 든 바가지는 동냥을 다니면서까지 아들을 옥바라지한 어머니를 형상화했다. 발에는 짚신을 신고 있다. 그 짚신 바로 아래 1949년 8월에 동상을 완성했음을 알리는 숫자와, 한자로 '박' 이라 쓴 작가의 서명이 보인다.


동상은 박승구의 작품이다. 백범은 경기상업학교, 경기중학교 미술교사를 지낸 조각가 박승구에게 어머니 동상을 맡겼지만, 작품은 백범이 안두희의 흉탄에 스러진 2개월 뒤에 완성되어, 정작 자신은 완성품을 보지 못했다. 작가는 백범의 장례를 치른 뒤, 어머니 동상을 완성하기까지 2개월의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박승구는 경기도 수원 출생이다. 1944년 일본 도쿄미술학교 조각과를 졸업한 뒤, 서울에서 교사와 작품 활동을 병행했으며, 1949년 가을에는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조각부에서 <성 관음상>으로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했다. 6·25전쟁 때 월북해, 조선 미술가동맹 조각분과 지도원과, 공예분과 위원장을 역임한 것으로 전해진다.


두 동상은 '백범 김구선생 동상건립 인천시민 추진위원회', '인천광역시’ '사단법인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협회' 등 3개 기관 단체의 이름으로, 1997년 10월 15일, 세워졌다. 시민 추진위원회 위원장은 마지막 송상으로 불리던 이회림 동양제철화학 회장이 맡았고, 당시 시장은 YS계의 핵심 최기선이었다. 두 사람 모두 고인이 되었다. 동상 건립비용을 낸 개인은 이회림 회장을 포함해 33명이었고, 여러 기업체와 기관에서 동참했다. 김우중 회장의 대우 중공업과 인천 경기 지역의 향토은행 경기은행도 참여했다. 대우 중공업은 두산 인프라코어로 바뀌었으며, 경기은행은 IMF 외환위기 당시 퇴출 대상에 올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열 두곳이나 되는 인천지역 상호신용금고도 보탰는데, 이들 역시 지금은 낯선 존재가 되었다. 동상은 장소와 시간을 연결해주는 매개체다. 신산했던 백범의 삶과 함께, 우리 근현대사의 단면, 역사 속으로 스러진 인물들을 만나는 소중한 단서가 되어준다.


그렇다면 백범의 아버지는 어떤 인물일까. 아버지 김순영도 탈옥한 아들 대신, 옥살이를 하는 등 모진 고초를 겪었다. 외아들이 인천 감옥에 갇히자, 부모는 해주의 집 문을 닫아걸고, 인천으로 옮겨와 살았다. 모친은 날품을 팔아 옥바라지를 했고, 부친은 강화와 서울을 오가며 석방의 길을 찾았다. 서울에서 소송을 했지만, 결과가 없자 소송 문건을 챙겨 강화의 문장가 이건창을 찾아가 방책을 물었다. 탈옥 직전 '인천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시라고 당부한 백범의 말을 따라, 부모는 해주로 돌아갔지만 뒤따라 온 인천 순경에게 붙잡혀 인천 감옥에 갇혔다. 모친은 곧 석방되었지만 부친은 고문 속에 1년 정도 징역살이를 하고 1899년 3월, 석방되었다. 백범은 뒤늦게야 이 사실을 알고 눈물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