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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곧 현대사의 파노라마. 죽산 조봉암 - 최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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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곧 현대사의 파노라마. 죽산 조봉암


2020년 1월 7일, 서울 종로구의 한 식당에서는 아주 특별한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죽산 조봉암 선생의 어록을 모은 책, 《죽산 조봉암 어록》을 펴낸 것이다. 600쪽 분량의 두툼한 책은, 인천광역시가 출판비용을 댄 비매품이었다. 시 예산으로 개인 어록을 출간할 만큼 죽산은 인천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죽산 조봉암은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 그리고 6·25전쟁과 전후 복구 과정이라는 우리 현대사의 격랑을 온몸으로 헤쳐나간 인물이자, 공작정치의 희생양이었다.


경기도 강화군 선원면 금월리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4년제 강화공립 보통학교와, 2년제 농업 보습학교를 다니고, 강화군청 급사로 취직, 면서기와 대서 보조원 등으로 5년 정도 근무했다. 강화에 3·1운동이 들불처럼 번지던 시기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혐의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9월 30일 출소했다. 독립운동을 향한 열의와 공부 열정을 떨치지 못한 그는, 스물두 살 되던 1920년 1월, 경성 YMCA 중학부에 입학했다. 그해 5월에는 대동단 사건으로 평양경찰서에 연행되어 2주간 조사를 받았다.


1921년 7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에 입학했다. 엿장수를 하며 유학비용을 마련했던 그는, 11월 29일 박열, 김약수 등과 함께 재일 유학생 최초의 아나키스트 모임 ‘흑도회’를 조직했다. 볼셰비즘에 빠져들어, 주오대학 전문부 정치 경제과에 입학했다가 1922년에는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들어갔다. 1923년 8월, 폐결핵으로 학업을 중단했고, 1924년 9월, 조선일보에 기자로 입사했다. 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을 결성해, 모스크바 로부터 승인을 받았고, 1926년에는 상하이에 조선공산당 해외부를 설치했다.


6·10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상하이 한인청년동맹을 조직하는 등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32년 9월, 상하이에서 프랑스 경찰에 체포되어 일본 경찰에 신병이 넘겨졌다. 1933년,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1939년 가석방으로 출옥, 인천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1945년 예비구금령으로 다시 구속되었다가, 8·15해방으로 풀려났다. 사흘 뒤인 8월 18일,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를 조직했다. 1946년 2월, 인천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결성하고 회장이 되었으나, 4개월여 뒤인 6월 23일 '비공산 정부를 세우자’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전향했다. 《3천만 동포에게 고함》, 《공산주의 모순 발견》 등의 소책자를 저술하고, 그해 8월 2일, 기자회견을 갖고 반공노선을 천명했다.


1948년 인천을구에서 제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의원으로 활동했고, 8월 2일, 초대 농림부장관에 지명되어 농지개혁법을 입안했다. 그가 기초한 농지개혁법은 지금까지 '세계 최고의 토지균등성을 확보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49년 2월, 농림부 장관직을 사임하고, 1950년 5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인천 병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재선의원으로 활약했다.


1952년과 1956년 대통령선거에 잇따라 출마해 차점자로 낙선했다. 1956년 11월, 진보당 창당대회를 열고 당위원장이 되었다. 60세가 되던 1958년 1월, 진보당 사건으로 검거되었고, 7월 2일, 1심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는데, 그해 10월, 2심에서 국가 변란을 목적으로, 진보당을 결성하고 간첩행위를 했다며, 사형을 선고했다. 1959년 7월 31일 오전 11시, 사형이 집행되었고, 이틀 뒤 망우리 묘지에 안장되었다.


죽산의 죽음은 대한민국 헌정사상 첫 번째 사법살인으로 꼽힌다. 2006년 딸 조호정 등 가족들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 진실 규명을 요청했고, 2007년 9월, 과거사위는 '국가가 피해자와 유족에게 총체적으로 사과하고, 재심 등 상응한 조치를 취하며 독립유공자로 인정하라'고 권유했다. 2008년 8월, 가족들이 대법원에 재심을 요청했고, 그해 광복절에 납북된 부인 김조이 여사에게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2011년 1월 20일, 대법원 전원 합의부는 죽산 조봉암에게 사형을 선고했던 국가보안법과 간첩죄 등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52년 만이었다.


어느 한 사람의 인생이 이처럼 빠르게 장면이 바뀔 수 있을까. 이보다 더 드라마틱한 인생을 그려낼 수가 있을까. 조봉암의 인생은 그 자체로 파노라마 같은 우리 현대사를 보여준다. 그를 큰 인물로 만든 것은 아마도 서대문형무소였을 것이다. 고문에 꺾이지 않고 잡초처럼 일어서 일생을 치열하게 살았다. 6·25전쟁에서, 남한의 농민들이 북한군에게 동조하지 않았던 것은, 조봉암의 농지개혁 덕분이라는 점은 이미 정평이 나 있다. 그런데 이승만 정권은 그를 간첩으로 몰아 사형을 강제했다. 죽산에게 죄가 있었다면, 이승만과 대결한 것뿐이었다.


조봉암이 대단히 진보적이면서 공부를 많이 했다는 사실은 그의 제헌의원 시절 발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한민국'이란 국호를 비판하는 대목을 보자. 1948년 6월 30일, 제1회 본회의 제21차 회의에서 조봉암이 '민주주의가 정말 방성대곡할 일'이라면서 발언한 내용의 일부이다.


‘총강에 특징적으로 주목을 끄는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국호 표시와 인민을 일률적으로 '국민'이라는 어구로 표시한 점입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했는데, 소위 민주공화국에 ‘대한’이란 대는 아랑곳이 없는 것입니다. 한이란 말이 꼭 필요하다면 '한국'도 좋고 우리말로 '한나라'라고 해도 좋을 것을, 큰 대 자를 넣은 것은 봉건적 자존비타심의 발성이요, 본질적으로는 사대주의 사상의 표현인 것뿐입니다.’


'대한민국'이란 말이 '대일본제국'과 무엇이 다르냐는 지적이다. 또 전 세계가 쓰는 '인

민'이란 말을 버리고 '국민'이라는 엉뚱한 말을 차용해서는 안 된다고 질타했다. '인민'을 공산당 측에서 쓴다는 이유로 기피해, 미국이나 프랑스 등지에서도 쓰는 말을 억지로 '국민'이라 바꾸는 것은 완고하고 고루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했다.


인천을 여행하면서 조봉암이란 인물을 떠올린다면, 대한민국의 '대'자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고, '인민'과 '국민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한 번쯤 고민해 보았으면 싶다. 조봉암은 1942년, 인천시 중구 도원동 12번지 부영주택으로 이사해 생활한 적이 있다. 지금으로 치면, 인천시에서 지은 시영주택이다. 경인전철 도원역 부근, 광성중고등학교로 오르는 언덕 오른편에 조봉암 가족이 살던 그 부영주택이 헐어질 듯 위태롭게 아직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