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물포 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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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뛰어난 의사는 나라를 고친다. 이민창 - 최희준
가장 뛰어난 의사는 나라를 고친다. 이민창
2019년은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었다. 온 나라가 독립운동을 이야기했다. 우리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호출했고, 그들은 역사 속에서 걸어 나와,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인천에는 우리가 잊고 있는 아주 특별한 독립운동가가 있다. 이민창. 1955년 발간된 고일 선생의 《인천석금》은 그를 영웅으로 묘사한다. <인술에 여생 바치는 노투사 '이민창' 씨> 라는 글을 토대로 이민창의 독립운동과 수감 생활, 해방 후 활동 등을 간략하게 정리해 본다.
1941년이었다. '너희들이 합병 후, 30년이 지나면 독립을 준다고 했으니, 이제는 우리나라를 돌려보내라'는 내용의 벽보와 전단이 인천시내 곳곳에 나붙었다. 조선총독과 일본 내각 대신들에게도 서한이 발송됐다. 병원을 운영하던 이민창이 혼자서 한 일이었다. 그는 거리로 나가,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으며, 자주독립의 필연성을 국제정세에 맞추어 연설했다. 청중들은 “미쳤다” “큰일 나겠다"고 말하며 슬그머니 꽁무니를 뺐다.
이민창은 곧바로 체포되었다. 인천경찰서 고등계 형사 권오연이 담당했다. 그는 이민창을 고문했지만, 이민창은 굽히지 않고 목청을 돋워 취조하는 형사를 나무랐다.
“아무리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하는 네놈이지만, 한국인의 피를 받았다면 내 주장이 그래 그르냐? 옳으냐?”
권오연은 해방 후, '노죄수의 굳고 곧고 깨끗하고 거룩했던 그 기개, 용기, 명석, 준엄에는 고개가 수그러졌다'고 고백했다.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되어 갈 때, 독립문에 이르자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독립문의 유래를 연설했다. 지나던 행인들이 목례로 답했다.
이민창은 '가장 뛰어난 의사는 나라를 고치고, 그 다음이 사람을 구한다'는 말을 실천하기 위해, 약관의 나이에 한성병원부속학교에 입학해 강제병합 이전에 졸업, 서울에서 개업했다. 이화학당 출신을 부인으로 맞아 잘 살았으나, 1916년쯤 일제의 확정에 분개한 나머지 블라디 보스토크로 망명했다. 고국을 잊지 못해 몇 년 뒤, 양강도 경흥과 황해도 재령에서 공의 생활을 했다. 인천에는 1929년쯤 정착했다. 이중설 병원 자리에서 시작한 병원은 10년 정도 운영했다.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은 그는, 서대문형무소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옥중에서 조회때마다 불러야 했던 기미가요를 거부하고, 황국신민서도 일축했다. 형기가 더 늘어 청주형무소로 이감되었다. 4년여가 지나 1945년, 새해에 만기 출소일이 찾아왔다. 부인과 아들 딸, 가족들이 청주로 갔다. 이민창은 부인에게 말했다. "나는 독립이 되기 전에는 나가지 않고 감옥에서 죽을 테니, 어서 돌아가오. 집에 돌아간다고 해도, 일경들이 가족들을 못살게 굴 게 분명하니, 오히려 감옥에 있는 것이 가족들에게도 좋을 것이오."
만기를 넘기고 7~8개월 뒤인 해방이 되어서야 세상에 다시 나온 이민창은 어인 일인지, 집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했다. 웬 혁명가가 그리 많고, 애국자가 쏟아지고, 정치인이 범람하는 거냐는 이유였다. 정당인도, 지도자의 타이틀도 싫었던 그는, 그저 집 안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인술을 펼치고, 과학을 공부하는 데 시간을 쏟았다. 인천시내의 어떤 의사가 피란민 환자가 숨을 거두었는데 약값을 내지 않았다면서 사망진단서를 발급하지 않자, 격분한 이민창이, 앞장서서 사망진단서를 끊어 주었다. 환자들에게는 형편에 맞게 치료비와 약값을 받았다. 여유가 되면 받고, 그렇지 못하면 안 받고 치료해 주었다.
노투사 이민창에 대한 자료는 아직까지 《인천석금》을 넘어서는 것이 없다. 확인해 보니, 고일 선생의 기록은 대단히 정확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중, 이민창의 것에는 아주 특별한 대목이 있다. 연령, 즉 생년월일을 적는 곳에 '개국 495년 5월 11일’, 로 써 놓았다. 일본 연호를 거부하고 조선이 나라를 연, 1392년을 기준 삼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1886년생이다.
인물카드의 본적지는 '경기도 인천부 화정 165'로 되어 있다. 당시 화정은 지금의
중구 신흥동 지역이다. 하지만 이민창과 대단히 가깝게 지냈던 것으로 보이는 고일 선생은 이민창이 서울 태생이라고 했다. 인천으로 이주한 뒤, 본적지를 바꾼 것인지도 확인해 볼 일이다.
이민창은 1946년, 병원을 내과의 이중 씨에게 넘겨주고, 동구 화평동 오두막 초가에서
은거했다. 그 뒤의 행적은 아직까지 찾아내지 못했다. 지사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이민창, 이제는 그만 은거를 접고, 이 땅의 후배들에게 예전에 행했던 큰 뜻을 베풀어주도록, 전문가들의 탐구가 뒤따랐으면 하는 바람이다.